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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기계 장례, 송승언 너 기계 죽었구나? 너 뭐였지? 기억나지 않는다 너 잘했는데? 너 뭔가 내게 전해 주었던 것 같은데? 고장 난 사람처럼 기억나지 않는? 기계였던 너 이제 기계 아닌 것이 되었구나? 나사 빠지고 분해되어 알 수 없게 된 모양을 하고서 다른 것이 되었구나? 아니 아무것도 아니구나? 너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너 아니다? 이제?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송승언 《사랑과 교육》, 민음의 시 260 2021. 9. 28.
[시] 태백, 유진목 ⠀12번 플랫폼에서 스위치백 열차를 탔습니다 열한 시 오십오 분에 청량리를 출발하는 열차였습니다 우리는 밤새 북쪽으로 가려고 했어요 ⠀열한 시 오십팔 분에 손목시계를 확인했습니다 열차는 이제 출발한다고요 그때 알았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것을요 ⠀열차는 오 분가량 지체하다가 출발했습니다 그 사이 계단을 올려다 봤어요 플랫폼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오래 입어 반들거리는 제복의 역무원이 수신호를 하고서 열차에 올라탔습니다 ⠀우리는 약속을 많이 했는데 대부분 지켜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옆 좌석에는 외투를 대신 벗어 두었습니다 아무려나 사람이 없었어요 한 량에 세 사람쯤 돼 보였습니다 열차 안이 밝아서 차창 밖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시를 떠나는 마음은 괜찮았어요 ⠀나는 가방에서 두 사람분의 도.. 2021. 7. 14.
[시] 누가, 서윤후 ⠀나는 천적이 없다는 듯 울었다 그건 근래의 기쁨이기도 했다 매미나 발정난 고양이도 내게 들리지 않게끔 힘껏 그래 봤자 양도된 이 슬픔은 어디선가 조금씩 모은 침묵이거나 손톱자국이었을 테지만 나는 처음으로 내가 들려오는 장면에 나왔다 고통에 걸신들린 인간의 이야기 울타리를 벗어나 부르기 시작한 노래 나는 작고 낮은 언덕에서 태어나 부풀어올랐다 누가 기다리는 빵 혹은 아직 설익은 배신감 젊음은 내가 자꾸 악몽의 종류로서 실눈과 선잠으로 꿰맨 밤을 뒤집어썼다 격자무늬 카펫을 털면서 더 많은 홀씨를 묻혀온 나를 용서하지 않는다 이중에서 나는 도깨비바늘로 자라났다 꽃과 섬유 사이의 피부는 나를 빚기 위해서 많은 곰팡이를 먹었다 푸르뎅뎅하게 빛나려고 그때 만지던 조물주의 손끝을 혈색으로 살고 있다 대충하지 않으면.. 2021. 7. 14.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 中 은호야, 사랑하는 내 아들아. 아주 오랜만에 눈을 떠 맞이하는 세상은 여전히 깊은 밤이구나, 어둠이구나. 하지만 더 이상 두렵지 않구나. 내 삶이 사람들에게 병든 치매 노인으로 읽히느니 차라리 실종으로 잃어버린 이야기가 되겠다고 이야기했던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나는 앞으로 근육도 못 쓰고 기억도 더 잃어가고 아무것도 남은 게 없이 죽어갈 테지만 이 또한 버릴 수 없는 내 인생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지금에야 깨닫게 되었구나. 은호야 내 인생이 책이 되어 읽힐 수 있도록 내 책에 실릴 내 연보를 네가 써주겠니? 은호야, 한 권의 책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 난 믿지 않는단다. 그럼에도 난 은호 너에게 한 권의 책 같은 사람이 되라고 그 말을 남기고 싶구나. 책이 세상을 바꿀 수 없어도 한 .. 2021. 4. 9.
[시] 아베마리아_최현우 얼음이 녹으면서 컵에 남긴 자국들은 공기의 살갗이라죠 시원하다, 두 손으로 차가운 컵을 쥐고 이마에 문지르며 눈썹이 젖어 서럽다 기쁜 마리아, 이제 없을 여름아 그 순간 나는 내 삶 그만 살자 생각했죠 당신이 더운 쇄골을 따라 훔쳐낼 때 매달린 땀방울 속 빛을 기었어요 순진한 무릎으로 기도를 빛내면 전구가 될까 그러나 마리아, 어둠이 무언가를 보게 할 수도 있나요 벽돌 한 칸 빠진 건물 기둥에서 긴급하지 않은 위태로움 속에서 무너진다, 무너지지 않는다 멍청한 희망으로 시곗바늘을 돌려 도망친 숲속 들짐승처럼 둘러싼 슬픔을 깨달았을 때 다쳐서 흘러나온 사람에서는 우유 냄새가 난다는 걸 알았죠 그날의 빛, 이제 없는 마리아 혼자서도 단단하고 차가운 컵을 쥐면 작고 미끄러운 미간을 만지는 기분 또다시 눈을 뜨면.. 2021. 4. 7.
[시] 공포의 천 가지 형태_양안다 숨이 멎을 때까지 우연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래 너 역시 동의할까 내가 너를 들여다보려 애쓰던 나날 네가 허벅지를 죽죽 그어 대던 장면을 본, 그 순간에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지나갔지 나는 그 장면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지만 끝내 우연 이라고 정의했다 네가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나는 그 살의의 수신자가 누구인지 궁금했고, 한번은 너에게 물어본 적도 있었지만 너는 자신도 누굴 죽이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살의는 그저 살의라며 그래 나는 슬픈 척 해도 들키지 않고 그래 죽고 싶다는 말을 삼킨 채 영원을 바란다 말하고 그래 이런 마음도 누가 엿볼 수 있는 걸까 내가 구토를 하면 너는 자지러지게 웃는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면 목뒤가 견딜 수 없이 가려워졌다 서로의 악취미를 숨기.. 2020. 12.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