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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쓴 글

[시] 태백, 유진목

by jeokyo 2021. 7. 14.

⠀12번 플랫폼에서 스위치백 열차를 탔습니다 열한 시 오십오 분에 청량리를 출발하는 열차였습니다 우리는 밤새 북쪽으로 가려고 했어요

⠀열한 시 오십팔 분에 손목시계를 확인했습니다 열차는 이제 출발한다고요 그때 알았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것을요

⠀열차는 오 분가량 지체하다가 출발했습니다 그 사이 계단을 올려다 봤어요 플랫폼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오래 입어 반들거리는 제복의 역무원이 수신호를 하고서 열차에 올라탔습니다

⠀우리는 약속을 많이 했는데 대부분 지켜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옆 좌석에는 외투를 대신 벗어 두었습니다 아무려나 사람이 없었어요 한 량에 세 사람쯤 돼 보였습니다 열차 안이 밝아서 차창 밖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시를 떠나는 마음은 괜찮았어요

⠀나는 가방에서 두 사람분의 도시락을 꺼냈습니다 어쩌면 뒤늦게 도착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신은 자주 늦었으니까요 그러면 플랫폼에 남아서 당신을 만났을 겁니다 괜찮아 다음 기차를 타면 돼 당신은 숨이 차서 금방 대답을 못 해요 다음 열차는 없다고 말입니다

⠀스위치백 열차는 곧 운행을 하지 않는다고 해요 한참을 자고 일어나면 산을 오르고 있던 게 생각이 났어요 눈이 하얗게 쌓여 있는데 새벽에는 파랗게 보였던 걸요 그때는 목이 메어서 보온병에 든 커피도 따라 마셨습니다

⠀나는 잘 도착했어요 아침 일찍 투숙해 한낮을 잤습니다 태백의 눈은 한번도 녹은 적이 없다고 해요 늦봄에 파묻혔던 고라니를 녹이면 금방 산속으로 뛰어 숨는다고요




유진목 《작가의 탄생》, 민음의 시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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