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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젓가락질 가운데_최현우 청춘의 핏물이 쌀뜨물이었노라 가르치는 사람 때문에 밥 먹기 싫어졌다 그날부터 잘못된 젓가락질을 연습했다 식당에 혼자 앉아 있으면 왜 꼭 의자가 하나 더 있는지 같이 있고 싶은 사람도 없는데 밥을 먹어도 허기가 돋는지 그럴 땐 저녁을 관찰한다 세상의 혈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멀리 가는 자의 뒷모습이 묻혀 배고픔을 잊을 때까지 시간은 피의 종류 하늘이 걸쭉해진 밤 골목이 뒷덜미를 드러낸다 내가 지구의 혈액을 조금 빤다고 해도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한다 입을 먼저 들이대는 습관은 사랑과 살의를 혼동하는 것 사람이 가르쳐준 예절은 피가 아니라 쌀을 먹는 법 불을 끈다 방구석에 앉아 무릎을 당겨 얼굴을 묻는다 혼자서, 깨물어보고 싶은 사람이 된다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_최현우(문학동네 시인.. 2020. 9. 19.
[시] 하늘은 지붕 위로_폴 베를렌 하늘은 지붕 위로저렇듯 푸르고 조용한데,지붕 위에 잎사귀를일렁이는 종려나무. 하늘 가운데 보이는 종부드럽게 울리는데,나무 위에 슬피우짖는 새 한 마리. 아하, 삶은 저기 저렇게 단순하고 평온하게 있는 것을.시가지에서 들려오는저 평화로운 웅성거림. ─ 뭘 했니? 여기서 이렇게 울고만 있는 너는, 말해 봐, 여기 이렇게 있는 너는 네 젊음을 가지고 뭘 했니? 예지_폴 베를렌(민음사 세계시인선 18) 내가 제일 처음 산 시집이 폴 베를렌의 시집이었는데 그 시집의 첫 번째 시.내게 여러 의미가 있는 시이다. 이 시를 좋아하면서도 시 자체는 별로 안 좋아하길 한참이었으니까. 2020. 8. 11.
[시] 응_문정희 햇살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한 신의 방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해와 달 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응” 응_문정희(민음의 시 205) 2020. 7. 18.
[시] 차가운 신발_백무산 쿵 소리에 놀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침 현관문을 여는 순간 지난 저녁 어스름에 서쪽으로 난 창에서 들리던 소리 새 한마리 마루 밑 내 신발 위에 피 흘리고 누워 있다 새가 뛰어든 곳은 붉은 노을 속인데 자신이 부닥친 것은 바로 자신 안쪽의 나는 이미 나에게서 떨어져 나온 거울상 그렇지 아, 저 밖이란 것이 있었지 피 흘리던 저곳이 새 한마리 내 차가운 신발을 신고 있다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_백무산(창비시선 442) 2020. 7. 12.
[시] 거울 저편의 겨울_한강 1 불꽃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파르스름한 심장 모양의 눈 가장 뜨겁고 밝은 건 그걸 둘러싼 주황색 속불꽃 가장 흔들리는 건 다시 그걸 둘러싼 반투명한 겉불꽃 내일 아침은 내가 가장 먼 도시로 가는 아침 오늘 아침은 불꽃의 파르스름한 눈이 내 눈 저편을 들여다본다 2 지금 나의 도시는 봄의 아침인데요 지구의 핵을 통과하면,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꿰뚫으면 그 도시가 나오는데요 그곳의 시차는 꼭 열두 시간 뒤, 계절은 꼭 반년 뒤 그러니까 그 도시는 지금 가을의 저녁 누군가가 가만히 뒤따라오듯 그 도시가 나의 도시를 뒤따라오는데요 밤을 건너려고 겨울을 건너려고 가만히 기다리는데요 누군가가 가만히 앞질러 가듯 나의 도시가 그 도시를 앞질러 가는 동안 3 거울 속에서 겨울이 기다리고 있었어 추운 곳 몹시 추운 곳.. 2020. 7. 7.
[시] 연둣빛 덩어리_조용미 연둣빛 덩어리는 갈참나무 위에 붙어 있었다 한 마디 한마디, 자리를 옮길 때마다 몸이 아주 조금씩 출렁였다 박각시나방 애벌레는 늦은 시월의 죽엽산에서 갈참나무 아래를 향해 구물구물 지구를 돌리고 있다 소나무 서어나무 떡갈나무가 나란히 쓰러져 산길을 막고 있는 가을 산, 박각시나방 애벌레 혼자 칼칼한 연둣빛이다 길은 반대 방향이다 기억의 행성_조용미(문학과지성 시인선 395) 2020. 6.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