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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공포의 천 가지 형태_양안다 숨이 멎을 때까지 우연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래 너 역시 동의할까 내가 너를 들여다보려 애쓰던 나날 네가 허벅지를 죽죽 그어 대던 장면을 본, 그 순간에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지나갔지 나는 그 장면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지만 끝내 우연 이라고 정의했다 네가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나는 그 살의의 수신자가 누구인지 궁금했고, 한번은 너에게 물어본 적도 있었지만 너는 자신도 누굴 죽이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살의는 그저 살의라며 그래 나는 슬픈 척 해도 들키지 않고 그래 죽고 싶다는 말을 삼킨 채 영원을 바란다 말하고 그래 이런 마음도 누가 엿볼 수 있는 걸까 내가 구토를 하면 너는 자지러지게 웃는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면 목뒤가 견딜 수 없이 가려워졌다 서로의 악취미를 숨기.. 2020. 12. 31.
[시] 젓가락질 가운데_최현우 청춘의 핏물이 쌀뜨물이었노라 가르치는 사람 때문에 밥 먹기 싫어졌다 그날부터 잘못된 젓가락질을 연습했다 식당에 혼자 앉아 있으면 왜 꼭 의자가 하나 더 있는지 같이 있고 싶은 사람도 없는데 밥을 먹어도 허기가 돋는지 그럴 땐 저녁을 관찰한다 세상의 혈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멀리 가는 자의 뒷모습이 묻혀 배고픔을 잊을 때까지 시간은 피의 종류 하늘이 걸쭉해진 밤 골목이 뒷덜미를 드러낸다 내가 지구의 혈액을 조금 빤다고 해도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한다 입을 먼저 들이대는 습관은 사랑과 살의를 혼동하는 것 사람이 가르쳐준 예절은 피가 아니라 쌀을 먹는 법 불을 끈다 방구석에 앉아 무릎을 당겨 얼굴을 묻는다 혼자서, 깨물어보고 싶은 사람이 된다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_최현우(문학동네 시인.. 2020. 9. 19.
[시] 하늘은 지붕 위로_폴 베를렌 하늘은 지붕 위로저렇듯 푸르고 조용한데,지붕 위에 잎사귀를일렁이는 종려나무. 하늘 가운데 보이는 종부드럽게 울리는데,나무 위에 슬피우짖는 새 한 마리. 아하, 삶은 저기 저렇게 단순하고 평온하게 있는 것을.시가지에서 들려오는저 평화로운 웅성거림. ─ 뭘 했니? 여기서 이렇게 울고만 있는 너는, 말해 봐, 여기 이렇게 있는 너는 네 젊음을 가지고 뭘 했니? 예지_폴 베를렌(민음사 세계시인선 18) 내가 제일 처음 산 시집이 폴 베를렌의 시집이었는데 그 시집의 첫 번째 시.내게 여러 의미가 있는 시이다. 이 시를 좋아하면서도 시 자체는 별로 안 좋아하길 한참이었으니까. 2020. 8. 11.
[시] 응_문정희 햇살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한 신의 방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해와 달 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응” 응_문정희(민음의 시 205) 2020. 7. 18.
[시] 차가운 신발_백무산 쿵 소리에 놀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침 현관문을 여는 순간 지난 저녁 어스름에 서쪽으로 난 창에서 들리던 소리 새 한마리 마루 밑 내 신발 위에 피 흘리고 누워 있다 새가 뛰어든 곳은 붉은 노을 속인데 자신이 부닥친 것은 바로 자신 안쪽의 나는 이미 나에게서 떨어져 나온 거울상 그렇지 아, 저 밖이란 것이 있었지 피 흘리던 저곳이 새 한마리 내 차가운 신발을 신고 있다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_백무산(창비시선 442) 2020. 7. 12.
[시] 거울 저편의 겨울_한강 1 불꽃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파르스름한 심장 모양의 눈 가장 뜨겁고 밝은 건 그걸 둘러싼 주황색 속불꽃 가장 흔들리는 건 다시 그걸 둘러싼 반투명한 겉불꽃 내일 아침은 내가 가장 먼 도시로 가는 아침 오늘 아침은 불꽃의 파르스름한 눈이 내 눈 저편을 들여다본다 2 지금 나의 도시는 봄의 아침인데요 지구의 핵을 통과하면,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꿰뚫으면 그 도시가 나오는데요 그곳의 시차는 꼭 열두 시간 뒤, 계절은 꼭 반년 뒤 그러니까 그 도시는 지금 가을의 저녁 누군가가 가만히 뒤따라오듯 그 도시가 나의 도시를 뒤따라오는데요 밤을 건너려고 겨울을 건너려고 가만히 기다리는데요 누군가가 가만히 앞질러 가듯 나의 도시가 그 도시를 앞질러 가는 동안 3 거울 속에서 겨울이 기다리고 있었어 추운 곳 몹시 추운 곳.. 2020. 7. 7.